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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 & 여행 & 등산

서울둘레길 5코스 석수에서사당까지

by e1mo518518 2018.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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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맑음
1100 ~ 1530
물300ml한병, 맥주한캔, 피칸 한움쿰

호압사(虎壓寺 범,누를,절)

건립시의 기 : 1394년(조선태조 2년, 무학대사 창건)

소재지 : 금천구 시흥2동 234(호암길 333)

등록일자 : 1988.12.19

금천구의 유일한 전통사찰인 호압사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태조는 왕사(王師)인 무학대사(1327~1405)의 조언으로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 태조의 꿈속에 어둠 속에서 받은 호랑이이고, 반은 모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눈에 불을 뿜으며 건물을 들이받으려고 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화살을 쏘아댔지만 괴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려차례 짓던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졌다.

 태조가 침통한 마음으로 침실에 들었을때 어디선가 "한양은 비할 데 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라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 노인이 있어 무슨 묘안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만히 가리키는 노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호랑이 머리를 한 산봉우리가 한양을 굽어보고 있었다. 꿈에서 깬 태조는 무학대사를 불러 말을 전하였고, 무학대사는 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호암산(虎岩山)에 호압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호압사에는 현재 문화재 8호인 석약사여래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도량 내에 있는 500년 수령을 지닌 두 그루의 보호수는 호압사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이며, 호압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주는 안식처로 육백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숲이좋은길(관악산 도란도란 걷는길) 

호압사 : 호압사에는 현재 문화재8호인 석약사여래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도량 내에 있는 500년 수령을 지닌 두 그루의 보호수는 호압사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이며, 호압사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편안한 쉼터를 마련해주는 안식처로 육백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호압사가 창건된 데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먼저<신중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금천의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과 같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 까닭에 그 바위를 범바위라 부른다. 풍수가들이 이를 보고 바위 북쪽에다 절을 세워 호갑(虎岬;범 산허리)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1394년(태조 3년)을 전후에 조선의 도읍을 서울로 정하고 궁궐을 짓는 과정에서 밤마다 괴물이 나타나 궁궐을 무너뜨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에 무학대사의 조언을 받아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현재의 터에 사찰을 짓고 한양의 지세를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천주교 삼성산성지 : 1893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한 조선 제2대 교구장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 신부, 성 야고보 샤스탕 정 신부의 유해가 안장된 곳이다. 세 성직자는 1925년 7월 25일 시복되었으며, 1970년 봄 오기선 신부에 의해 그동안 아무런 표시도 없이 방치되어 오던 삼성산이 세 정직자의 매장되었던 곳으로 확인됨에 따라, 같은 해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 및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비석을 베우고 촉성식을 자기면서 삼성산 안장터는 성지로서 최소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약수사 : 약수암(藥水庵; 약 물 암자)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교구 본사인 조계상의 말사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김처사(金處士 ; 예전에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던 선비 )라는 사람이 초가삼간을 짓고 수도하던 것이 절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후 1880년(고종 17년)에 명성황후가 법당을 건립하면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노는 대웅전과 응향각, 요사채가 있다. 실제 창건된 것이 근대 이후이므로 중요한 문화재는 없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간에 팔작지붕으로 안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지정보살상, 관세음보살상이 있다. 이 사찰은 재산상으로는 총무원 소속이나 설제로는 승가대 부속사찰로 되어 있는 비구니 도량이다.


맥주한캔 하고있는데, 찾아온 청설모


낙성대가 이런의미였네요.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이 태어난 장소이다. 장군이 태어날 때 이 곳에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장군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것을 비롯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고려 백성은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찬양하여 장군이 태어난 집터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이 석탑은 서울특별시에서 1964년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며, 1974년 6월이 곳에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공원 내에 사당을 건립해 영정을 모시면서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이 탑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강감찬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즉 어느날 밤 중국의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이를 낳았다. 그 아기가 곧 강감찬이며,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만나보고는 문곡성(文曲星) 의 화신(化身)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장군과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장군의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 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여우여인과 관계를 맺게되어 낳게 된 것이 장군이라는 것이다. 그의 출생담은 흔히 시조나 위인등에서 나타나는 출생설화와 일치한다.

 또한 장군이 소년원님으로 부임하였을때 그가 너무 어리다고 얕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 넣어보라고 하였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일년 자란 수숫대로 소매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기를 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어느 고을에서 여름날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관속에서 부적을 써주고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 곳의 개구리가 다시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에서 전승된다. 또 그가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년 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번만 낳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안국사(安國祠; 편안할, 나라, 사당 : 낙성대공원에 있는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948 ~ 1031)의 사당으로,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이라는 호를 딴 안국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1974년 강감찬 장군의 출생 지역인 낙성대에 건립하였고, 사당주변을 공원화하여 낙성대공원을 조성하였다.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의 낙성대는 장군이 출생하던 날 출생지에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 지은 이름이며, 1972년 5월 25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4호로 지정된 낙성대 3층석탑이 경내에 있다.

 안국사는 낙성대공원의 연못 뒤쪽에 있으며 길이 409m의 사괴석(四塊石;벽이나 돌담을 쌓는데 쓰는, 한사람이 네덩이를 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에 기념 휘호석과 관리사무실이 있으며 안국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외삼문을 통과하면 잔디와 수목으로 깔끔하게 조경한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 좌우측에는 고려강감찬장군사적비와 강감찬낙성대라는 명문이 새겨진 삼층석탑이 있으며, 정원 안쪽의 낮은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안국사)이 나온다.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은 면적 237.6 제곱미터의 정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건물로, 고려시대 목조건축물인 경상북도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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