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캠핑 & 여행 & 등산

트랭글 13Km 트래킹완주메달 20161029

by e1mo518518 2016. 12. 14.
728x90
728x90
SMALL

 트랭글에서 주최하는 트래킹 올해는 13키로만 가기로 했습니다.

작년엔 20키로 8시간?정도 다녔는데, 이번엔 짧게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완주 메달을 먼저 보여드립니다.

 

저는 치즈라면 - 뚝배기에 끓여나오는데, 오랫동안 뜨끈뜨끈하게 먹을수 있겠습니다.

유명인사?들도 많이 다녀간듯합니다.

안국동 맛집 "라면땡기는날" 꽤 유명한집인가봅니다.

드디어 북악산 하산길

북악스카이웨이 올라가는길

여기 터널을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번번히 놓치네요.

 

북악산 올라기는길에 왼쪽 뒤로 보여지는 풍경

인왕산 올라가는길에 보이는 들꽃 풀꽃

저기 멀리 보이는 북악산

 

 

 

 

대한문을 지나서

 

아침 8시30분에 도착해서 주차하고 서울시청에 모였습니다.

 

어렵지않은 4시간정도의 코스입니다.
작년엔 20km 였는데, 올해는간단하게 ㅎ

 

 북악산 : 서울 경복궁 북쪽에 솟아 그 진산을 이루어온 산, 높이 : 342m

고려 숙종 때 북악산 아래는 남쪽의 수도인 남경()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였으며 당시에는 북악산을 면악이라 기록하여 전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북악산을 백악산()이라고도 불렀는데 백악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게된 이름이다. 이후 도성()인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북악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남쪽으로 마주보고 있는 산을 남산()이라고 불렀다. 북악산의 높이는 342m이며 남쪽으로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모양은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솟아난 형상으로 주변의 산에 비해 도드라져 보인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 이성계의 신망이 두터웠던 무학대사()에 의해 왕가의 기운을 받은 명산으로 칭송되었으며 그 아래 조선왕조의 궁궐을 세우고 도읍으로 정하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세워지자 산정부에는 백악산신을 모시는 신사가 만들어졌다. 1394년(태조 4년)에 북악산 아래 경복궁을 축성하였으며 대한민국에 들어서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도 이곳에 위치했다. 현재도 대통령의 집무실인 청와대()가 북악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 
    

기반암은 화강암으로, 인왕산()·낙산()·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다. 이들 산지 능선을 연결한 옛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을 기점으로 축조되었다. 산 능선에는 옛 성벽이 원형대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서쪽 산기슭과 인왕산과의 사이의 안부에는 서울 4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일명 )이 남아 있으며 부암동 뒤쪽에는 백석동천() 계곡이 있다. 북악산은 예전부터 소나무가 울창한 경승지를 이루어 조선시대 선비들이 계곡을 찾아 탁족회()를 자주 열었던 곳이다. 하지만 이후 소나무가 벌채로 사라지고 현재는 참나무류가 많다. 북악산 산정을 내려와 남쪽 기슭에 청와대가 있다. 창의문에서부터 정릉() 입구에 이르는 북악스카이웨이가 북악산 주봉 북쪽 사면을 끼고 돌면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달리고, 남동쪽 산기슭에는 삼청()공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악산 [北岳山] (두산백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도성의 북쪽에 자리한 숙정문을 지나면 촛대바위에 이르고, 서쪽을 보면 북악산 정상이다. 북악산은 경복궁 북쪽에 대나무 순 같이 우뚝 솟은 산으로 백악() 또는 공극산(), 면악()이라고도 한다. 고려 숙종 9년에 윤관 등이 남경 터를 아뢰기를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형과 수세가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신라 말의 풍수지리가인 도선도 충천목성()이 가히 궁궐의 주룡()이 된다 하였던 곳이다. 이 산에 오르면 서울을 받치고 있는 북한산이 한눈에 보이고 앞으로는 경복궁과 청와대가 펼쳐지고, 조선에서 현재로 이어진 서울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보인다.

북악산에서 내려가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윤동주 시비가 있고, 다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길이 나온다. 조선시대의 부유한 관원이나 사대부들은 이곳 인왕산이나 낙산 부근에 별장을 마련하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북악산에서 내려가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윤동주 시비가 있고, 다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이 나온다. 조선시대의 부유한 관원이나 사대부들은 이곳 인왕산이나 낙산 부근에 별장을 마련하고 풍류를 즐겼는데, 인왕산 아래에 필운대()가 있었다. 이곳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백사 이항복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 권율의 집에 처가살이를 하였으므로 필운이라고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라는 세 글자는 이 백사의 글씨다. 대 곁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꽃 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된다.

이곳 필운대를 비롯하여 정조가 꼽은 서울의 여덟 개 명소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영’조에 국도팔영()이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필운대의 꽃과 버들, 압구정에 뜬 배, 삼청동의 녹음, 자각의 관등, 청계의 단풍놀이, 반지의 연꽃 구경, 세검정의 시원한 폭포, 광통교의 밝은 달이 바로 팔영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이 산을 많이 올랐는데, 그중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김상헌이 이 산을 답사한 뒤 『서산유람기(西)』를 남겼다.

갑인년 가을 모친께서 안질에 걸렸다. 좋은 샘물이 서산에서 나오므로 병든 사람이 씻으면 왕왕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날을 잡아 길을 떠났다. 형님(김상용)과 나, 광찬과 광숙도 따라갔다. 인왕동으로 들어가 예전에 우의정을 지낸 양곡 소세양의 옛집을 지났다. 청심당, 풍천각, 수운헌이라고 이름을 붙인 건물들은 무너진 문과 부서진 주춧돌만 남아 있어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양곡 소세양은 문장으로 당대에 현달하고 부귀하였던 데다가 또 집을 잘 설계한다는 명성이 있어 건물의 꾸밈이 교묘하고 화려하였다. 사귄 사람들도 모두 한때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었다. 그가 짓고 읊조린 시문들은 반드시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만한 것이었을 텐데, 백 년도 채 되지 못한 지금 한두 개도 남아 있지 않다. 선비가 의지하여 후대에 베풀 바는 여기(집의 설계와 시문의 창작)에 있지 않은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오늘날 건물을 으리으리하게 짓거나 외양을 잘 치장하여 그것으로 자기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데, 집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견고하게 남아 있겠는가? 10년, 아니 5년도 못 가서 허물어버리고 새로 짓는 집들. 김상헌의 기문을 읽으면 고금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왕산으로 오르는 성곽길은 가파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왕산 정상을 향해 가다가 북쪽으로 보이는 능선이 그림과 같다. 기차바위라고 불리는 저 능선이 상명대를 지나 북한산의 비봉으로 연결 되는 탕춘대()성이다. 탕춘대는 신영동 136번지에 있는 돈대()다. 풍류를 좋아한 연산군은 그의 재임 11년(1505)에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이곳에 탕춘대를 짓고, 앞 시냇가에는 수각을 지었다. 연산군은 그 옆에 돌로 술 주전자를 만들어놓고, 때에 따라 아름다운 여자들을 데리고 와서 질탕하게 놀다 갔다. 영조 27년(1751) 가을에 영조는 탕춘대에 거동하여 활쏘기로 무사를 뽑았고, 29년(1753)에는 탕충중성()을 새로 쌓았으며, 30년(1754)에는 탕춘대를 고쳐 연융대라 하고, 홍상서를 시켜 ‘연융대()’라는 세 글자를 써서 신영동 172번지 세검정 길가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겼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악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다음생각)

 


LIST